성공한 사람들을 도형으로 그리자면 원과 같다. 뾰족하지도 않고, 어긋나지도 않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는 곡선으로 모서리가 없는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는 자연현상과 일상의 생활주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가장 많은 형태라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움에 원의 상징이 숨어 있다. 완성과 영원성, 어머니라는 상징이 바로 그것이다. 영원은 철학이 추구하는 것이다. 특히 동양철학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영원한 도(道)이다. 성공한 사람은 도를 닦는 사람들 같다. 영원한 그 무엇을 찾는 구도자들이다.
비즈니스맨들이 추구하는 도는 수도자들이 구하는 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다. 풍기는 향기도 다르다. 추구하는 도에 따라 비즈니스 승자의 품격도 나눠지는 것도 수도자들과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그 다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것이 숨어 있다. 한 가지 원리가 같다. 다름 속의 같은 것은 무엇인가. 중국 고사를 들여다보자.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와 조나라가 진평에서 대치하게 됐다. 조나라 효성왕은 조괄을 장수로 삼으려고 했다. 조괄은 조나라 명장이었던 조사의 아들이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대해서 말하자면 세상에 자신을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의 부친 조사는 조괄의 병법이론에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뛰어나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괄의 모친이 조사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조사가 대답하기를 “전쟁이란 사람이 죽는 거요. 그런데 괄은 전쟁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하고 있소. 조나라가 괄을 장수로 삼았다가는 분명 그 애가 조나라 군대를 망하게 할 것이오.”라고 했다.
같은 이유로 당시 명재상이었던 인상여와 조괄의 모친이 조사의 장수임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효성왕은 이를 무시했다. 조괄은 장수가 되자 군령을 모조리 뜯어 고치고 군리들도 전부 교체하는 등 쇄신을 단행했다. 자신의 이론에 대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조괄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대패의 주인공이 됐다. 진나라 장군 백기에게 약 45만 명의 군사를 잃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후 조나라의 위세는 급격히 시들고 얼마 후 멸망했다.
사마천의 사기 중 <염파인상여열전>에 나오는 얘기다. 사마천은 조괄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말미에 겨우 실은 일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화에서 섬뜩한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 최고라고 스스로 자평하는 조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이나 강력하다.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망한다.’
노자의 말에서 빌렸다.
현대사로 달려가 보자.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똑같은 잘못을 재현했다. 히틀러는 독일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미국의 힘과 러시아의 겨울을 과소면적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개인적으로 자아도취가 심했던 히틀러는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의 집단적 자아도취를 고취 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독일을 전쟁 패배로 몰고 갔다. 자아도취라는 광기에 휩쓸려 유태인 대학살 등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도 저질렀다.
칼리큘라, 네로, 진시황, 연산군, 스탈린, 레닌, 히틀러, 이디 아민 등등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굵직한 악의 축들은 모조리 자아도취병 환자들이다. 이들 또한 역사의 패자들이다.
자아도취는 교만으로도 풀이가 가능하다. 교만해지면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객관적 시각이 없다보니 합리적 판단은 기대할 수가 없다. 결론은 패자로 귀착이 된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자아도취는 양성과 악성으로 나뉘는데 양성 자아도취는 어느 정도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 양성 자아도취는 자신의 노력의 결과다. 예컨대 예술가로서, 비즈니스맨으로서, 또는 농부로서 자기가 한 일에 자아도취적인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정도 나름이다. 한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다. 악성자아도취는 그가 하는 일이나 만들어 내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가 갖고 있는 것, 몸, 풍채, 건강, 재산, 신분 등이 자아도취 대상이다. 이는 양성형태에서는 볼 수 있는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없고, 따라서 중화적 요소도 없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악성이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자기만족의 징후를 보이는 사람, 비판에 민감한 사람, 어떤 일이든 합리화를 시키는 사람 등은 자아도취적인 경향이 농후한 사람이다. 변명만 일삼는 사람도 자아도취 병폐를 앓는 사람이다.
역사를 들먹거렸지만 사실 병적인 자아도취는 우리 주변에 소복이 쌓여 있다. 비즈니스 승자, 패자와의 대화가 직업의 한 과정이 돼버린 필자는 이러한 사항을 똑똑히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 패자뿐만 아니라 승자에게도 병적인 자
자연스러움에 원의 상징이 숨어 있다. 완성과 영원성, 어머니라는 상징이 바로 그것이다. 영원은 철학이 추구하는 것이다. 특히 동양철학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영원한 도(道)이다. 성공한 사람은 도를 닦는 사람들 같다. 영원한 그 무엇을 찾는 구도자들이다.
비즈니스맨들이 추구하는 도는 수도자들이 구하는 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크기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다. 풍기는 향기도 다르다. 추구하는 도에 따라 비즈니스 승자의 품격도 나눠지는 것도 수도자들과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그 다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것이 숨어 있다. 한 가지 원리가 같다. 다름 속의 같은 것은 무엇인가. 중국 고사를 들여다보자.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와 조나라가 진평에서 대치하게 됐다. 조나라 효성왕은 조괄을 장수로 삼으려고 했다. 조괄은 조나라 명장이었던 조사의 아들이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대해서 말하자면 세상에 자신을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의 부친 조사는 조괄의 병법이론에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뛰어나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괄의 모친이 조사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조사가 대답하기를 “전쟁이란 사람이 죽는 거요. 그런데 괄은 전쟁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말하고 있소. 조나라가 괄을 장수로 삼았다가는 분명 그 애가 조나라 군대를 망하게 할 것이오.”라고 했다.
같은 이유로 당시 명재상이었던 인상여와 조괄의 모친이 조사의 장수임명을 반대했다. 그러나 효성왕은 이를 무시했다. 조괄은 장수가 되자 군령을 모조리 뜯어 고치고 군리들도 전부 교체하는 등 쇄신을 단행했다. 자신의 이론에 대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조괄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대패의 주인공이 됐다. 진나라 장군 백기에게 약 45만 명의 군사를 잃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이후 조나라의 위세는 급격히 시들고 얼마 후 멸망했다.
사마천의 사기 중 <염파인상여열전>에 나오는 얘기다. 사마천은 조괄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말미에 겨우 실은 일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화에서 섬뜩한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 최고라고 스스로 자평하는 조괄에게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이나 강력하다.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망한다.’
노자의 말에서 빌렸다.
현대사로 달려가 보자.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똑같은 잘못을 재현했다. 히틀러는 독일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미국의 힘과 러시아의 겨울을 과소면적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개인적으로 자아도취가 심했던 히틀러는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의 집단적 자아도취를 고취 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독일을 전쟁 패배로 몰고 갔다. 자아도취라는 광기에 휩쓸려 유태인 대학살 등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도 저질렀다.
칼리큘라, 네로, 진시황, 연산군, 스탈린, 레닌, 히틀러, 이디 아민 등등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굵직한 악의 축들은 모조리 자아도취병 환자들이다. 이들 또한 역사의 패자들이다.
자아도취는 교만으로도 풀이가 가능하다. 교만해지면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객관적 시각이 없다보니 합리적 판단은 기대할 수가 없다. 결론은 패자로 귀착이 된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자아도취는 양성과 악성으로 나뉘는데 양성 자아도취는 어느 정도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 양성 자아도취는 자신의 노력의 결과다. 예컨대 예술가로서, 비즈니스맨으로서, 또는 농부로서 자기가 한 일에 자아도취적인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정도 나름이다. 한계가 분명히 정해져 있다. 악성자아도취는 그가 하는 일이나 만들어 내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가 갖고 있는 것, 몸, 풍채, 건강, 재산, 신분 등이 자아도취 대상이다. 이는 양성형태에서는 볼 수 있는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없고, 따라서 중화적 요소도 없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악성이다.
자아도취적인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자기만족의 징후를 보이는 사람, 비판에 민감한 사람, 어떤 일이든 합리화를 시키는 사람 등은 자아도취적인 경향이 농후한 사람이다. 변명만 일삼는 사람도 자아도취 병폐를 앓는 사람이다.
역사를 들먹거렸지만 사실 병적인 자아도취는 우리 주변에 소복이 쌓여 있다. 비즈니스 승자, 패자와의 대화가 직업의 한 과정이 돼버린 필자는 이러한 사항을 똑똑히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 패자뿐만 아니라 승자에게도 병적인 자